묻지 않으면 답을 주지 않다

전창렬(변호사)

 서울 법대 재학 중 나는 뜻을 같이한 전국의 대학생 불자들과 함께 1963년 말 ‘한국대학생 불교연합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동안 서양 사상과 철학에 익숙하던 대학생으로서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접하게 된 것은 지적 호기심과 열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나는 ‘한국대학생 불교연합회’ 지도교수 이기영 박사가 강의하던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 강좌를 열심히 청강하고 있었다.

1964년 어느 날, 이기영 박사는 강원도 월정사에서 개최한 대학생 수련회에 지도교수로 참여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탄허 스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탄허 스님은 불교의 종지를 요약하거나 부연함에 있어서 자유자재하셨고, 특히 동양학에 대한 박학다식과 생불과 같은 위의威儀를 갖춘 한국 불교의 보배다.”

때마침 법대 동기생인 명호근 군으로부터 탄허 스님이 조계사에 와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찾아가 뵙기로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한국대학생 불교연합회와 대한불교청년회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신분임을 밝히고 친견을 청하여 간신히 허락받았다. 당시에는 대학생 불교신자가 극소수였기 때문에 특별 대접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조계사 주지 스님 방에서 처음으로 탄허 스님을 뵈었다. 엷은 갈색의 둥근 돌 안경 속에서 방사되는 안광은 허공을 투시하는 것 같았고 가부좌를 하고 계신 다부진 모습에서 태산의 무게감을 느꼈다. 우리는 불교 대학생의 자세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말씀을 청했는데, 탄허 스님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 중국의 왕도 정치와 패도 정치, 50대 초반에 지으셨다는 태백산 정상의 망월사 단군 기념비문에 담긴 한반도의 미래 그리고 국가적 과제와 지도자의 자세에 대하여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셨다. 그 근거로 동양 사상과 역사적 사례를 자유자재로 인용하시면서 정연한 논리로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찔러 나가셨다. 우리는 넋을 잃고 강연 내용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인사만 드릴 생각이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두 사람만 듣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내친 김에 더 많은 선배 동료와 함께 듣고 싶다고 간청하여 그날 오후 계속하여 무교동 중국집과 조계사 건너편 함평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탄허 스님께 밤새도록 가르침을 들었다. 스님의 소탈함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 그리고 지혜와 지식의 해박함과 심오함에 모두들 감탄하였다. 탄허 스님과의 첫 만남은 너무나 극적인 감동과 충격이었고 내 생애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탄허 스님은 출가하시기 전에 이미 유교와 도교의 경전을 두루 섭렵하시고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점을 해결할 수 없어 근세 한국 불교의 걸출한 거봉이시자 대선지식이신 한암 스님과 편지 문답을 하시다가 결국에는 출가하셨다. 출가 후 한암 스님의 지도하에 간경과 역해를 통해 불교의 종지를 깨우치고 3년간의 묵언과 참선을 거치면서 자기라는 주체가 확연히 빠져버려 화엄 법계와 하나가 되셨다.

그러나 탄허 스님의 깨달음의 거울 속에는 항상 중생의 삶과 그 터전인 사회와 국가가 있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는 것이다. 탄허 스님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충정은 크게는 화엄 사상과 적게는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간부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아버지 김홍규 님의 훈육과 행적에 큰 영향을 받으신 것으로 보인다.

탄허 스님은 평소에 민생구제와 국민정신 계도는 위정자의 몫이고 승려는 위정자에게 위대한 철학과 사상을 통해 갈 길을 제시하고 뒤에서 그 역할을 독려할 뿐이므로 나라를 구제하는 일은 비구승 10명을 기르는 것보다 한명의 불교인 정치가를 기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탄허 스님은 냉전체제가 고착화되어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담하던 시기에 한반도가 통일을 달성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태평양시대의 주도국가로서 세계사적 역할을 담당할 것임을 예견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이를 맞이하기 위해 도의적 인재 양성이 급선무라고 역설하셨다. 탄허 스님이 지칭하는 도의적 인재란 화엄 사상에 뿌리를 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원력을 갖추고 언행이 일치하는 지도자를 의미하는데, 이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재로 《신화엄경합론》 역해가 꼭 필요함을 강조하셨다.

가까이서 본 탄허 스님은 친절하고도 자상한 멘토셨다. 1960년대는 누구나 가난하고 궁핍하였다. 가장인 아버지가 직장에서 퇴직한 우리 집 형편은 더욱 가혹하였다. 나와 동생은 가정교사생활을 하여 겨우 학비와 생계비를 충당하고 있었고, 암담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대학생활을 포기하고 차라리 취업을 할까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탄허 스님은 이런 나에게 《맹자》의 ‘고자장구하편’ 15장 ‘천장강대임어시인야天將降大任於是人也’를 인용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히고 근골을 수고롭게 하며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하며 하는 일마다 어그러뜨리고 어지럽히는 등 고난과 시련을 주어서 분발하고 인내케 하여 그의 그릇과 능력을 더욱 키워 준다.”

탄허 스님의 이 말씀은 당시 힘든 상황 속에 있던 나에게 크나큰 용기와 힘을 주셨다. 지금까지도 《맹자》의 이 구절은 귀중한 생활 지표이자 교훈으로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다.

탄허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누구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예의를 갖춰 따뜻하게 맞이하셨다. 부득이하게 대중 강연을 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질문을 해야만 가르침을 주셨고, 기상천외한 질문에도 전광석화와 같이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하셨으며, 불교에 국한하지 않고 유교와 도교는 물론 동서양의 역사적 사례를 종행무진으로 구사하셔서 흥미를 돋우고 이해의 폭을 넓혀 주셨다.

그래서인지 정치권과 유명 인사들이 끊임없이 탄허 스님을 찾아오거나 가르침을 청하였다. 기억하기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양주동 박사가 《장자》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러 월정사에 며칠간 머무르다 가셨고, 함석헌 선생께서는 동양 사상에 대한 의문점을 해소하려고 아침 일찍 안암동에 있는 대원암에 자주 방문하셨다.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방사령관으로 있을 때는 관사로 탄허 스님을 초빙하기도 했다. 탄허 스님은 자신의 앞날과 역학에 대해 궁금해 하던 노태우 사령관에게 국가적 대임을 맡게 될 것을 전제로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도 한반도 분단의 고통 해소를 위해 남북 간 접촉과 대화가 중요성하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잊지 못할 나의 스승 탄허 스님을 감히 평한다면 출세간에 있어서는 대선사이자 대강사이시고, 세간에는 불세출의 경세가이시자 선각자셨다. 배움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위대한 교육자이셨고, 괴로움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는 따뜻한 멘토셨다.

불교 근대사에서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이 만행을, 혜월 스님이 농사짓고 밭 매는 것을, 수월 스님이 짚신을 삼아서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써 불교적 깨달음을 성숙시키는 보림의 방편으로 삼았다면 탄허 스님은 불경 번역과 후학 양성 그리고 중생고의 해결을 위한 끊임없는 정치적 멘토 역할로 보림의 방편으로 삼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