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4
제4칙 덕산협복자(德山挾複子)
송찬우 중앙승가대 교수
자기의 본분사를 청천백일(靑天百日)처럼 밝혔다면 이쪽이다 저쪽이다 하고 지적할 일이 없다.
그러나 사람을 제접할 시절인연이 부딪혀오면 반드시 병에 따라서 처방전이 나오듯 해야만 한다. 이 경지에서는 인연에 따라 행동해야만 옳은지, 본분사만을 지켜야 옳은지, 여러분은 시험 삼아 그 본보기를 살펴보라.
덕산(德山)스님은 본래 경론을 강의하는 대강사였다. 그는 처음엔 삼론(三論)을 익히다가 그 뒤 법상종(法相宗)을 익혔다.
그는 서촉(西蜀)지방에서 금강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교리에서 말하기를 금강유정(金剛喩定)에서 후득지(後得智)를 일으켜 천겁(千劫)동안 부처님 삼천위의(三千威儀)를 배우고 만겁을 부처님의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배워야만 성불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다시 부연한다면 금강유정은 십지만심(十地滿心)인 등각(等覺)의 경지에 이르러 얻어진 선정삼매이다. 이는 근본지(根本智)이다. 이 근본지 삼매를 얻으면 바로 그 뒤를 따라 방편지가 일어나는데, 이를 두고 근본지를 얻을 이후에 일어나는 지혜라는 뜻에서 후득지라고 한다. 이 지혜를 변지(徧智) 속지(俗智) 또는 여량지(如量智)라고도 한다. 요컨대 세속을 교화하는 분별지(分別智)이다. 교리적으로는 이와 같이 장시간 수행을 해야만 묘각(妙覺)을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 육조의 법맥을 이은 남방의 참선하는 사람들은 바로 현전일념의 마음이 부처이다(卽心是佛)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으로 삼대아승지겁을 경유하지 않고 공간적으로 사십이위(四十二位) 수행단계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 일초즉입여래지(一超卽入如來智)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두고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한다. 이는 법상교가의 학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론이다.
이로 인해 덕산은 남방에서 참선하는 이들을 불법을 해치는 마구니로 여기게 되었다.
이윽고 덕산은 분심을 내어 청룡(靑龍)스님이 지은 금강경소초(金剛經疏抄, 주석서)를 걸머지고 남방으로 떠나면서 이 마구니들을 기어코 타파하리라 다짐하였다.
길을 떠난 지 오래지 않아 풍주(灃州)고을에 당도하였는데, 길가에서 떡을 파는 한 노파를 만났다. 덕산은 걸망을 내려놓고 우선 떡을 사서 간식을 하리라 하였다.
노파는 물었다.
스님이 걸머지고 있는 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소
덕산은 말하였다.
금강경소초라오
노파는 말하였다.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질문에 답변을 주신다면 떡을 보시하겠지만 만일 대답을 못한다면 다른 곳에 가서 떡을 사서 드십시오
덕산이 질문을 하십시오 라고 말하자 노파는 말하였다.
“금강경에선 말하기를 이미 사라진 과거의 마음도 얻지를 못하고, 허망 분별로 일어나는 현재의 마음은 그 실체가 없으므로 현재의 마음도 얻지를 못하며, 미래는 아직 있지 않으므로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한다고 하였소 (過去心不可得現在心不可得未來心不可得).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디에서도 나의 마음은 끝내 얻지 못한다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을 스님의 참 마음이라고 분명하게 점을 찍겠습니까
큰 소리 치던 덕산은 그 노파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경만론(天經萬論)을 강론한다 해도 한 구절의 기틀 앞에선 입을 벙긋하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러자 노파는 용담(龍潭)스님을 찾아뵈라고 하였다.
덕산은 그 노파가 지시해 준대로 용담스님을 찾아가 절문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말하였다.
오래전부터 용담스님의 명성을 들었으나 막상 찾아와 보니 연못도 보이질 않고 그 연못에서 산다는 용마저도 더더욱 보이질 않는구나
그 말을 들은 용담은 병풍 뒤에서 나오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지금 용담을 찾아왔다네
덕산은 용담에게 예의를 갖춘 뒤 물러났다가 밤이 되자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가 시립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용담은 말하였다.
그대는 밤이 깊었는데 무엇 때문에 가지를 않는가
그 말을 들은 덕산은 큰스님 편안히 쉬십시오 하고 주렴을 걷고 문 밖으로 나왔더니 칠흑같이 캄캄하였다. 덕산은 문득 발길을 되돌리면서 말하였다.
문밖이 너무 캄캄하여 못가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용담은 그에게 촛불을 건네주었는데, 덕산이 그 촛불을 받으려 하자 용담은 바로 훅 불어서 촛불을 꺼버렸다.
그 순간 덕산은 활연대오하고 바로 예배를 올리자, 용담은 말하였다.
그대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예배를 하는가
덕산은 말하였다.
큰스님, 저는 앞으로 다시는 천하의 큰스님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이 대중 가운데 뛰어난 놈이 있는데 이빨은 검수(劍樹)와 같고 입은 피를 담은 항아리와 흡사하다. 이처럼 용맹하고 영리한 놈이어서 한 방망이로 때린다 해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 절대 향상의 경지에서 나의 도를 수립하고 있으리라
덕산은 그때서야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 쌓아놓고 불을 붙이면서 말하였다.
현묘한 도리를 끝까지 말한다 해도 그것은 마치 허공에 한 털을 날린 것과 같고 온 세상의 요점을 다 말했다 해도 거대한 바다에서 일어난 한 방울 물거품일 뿐이다
이 일이 있은 뒤 위산(潙山)스님이 성대한 교화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덕산은 바로 위산스님을 찾아가 학인의 입장에서 큰스님을 대하지 않고 같은 수준의 선지식으로 상대하였다.
그는 위산에 도착하자 걸망도 풀지 않고 바로 법당으로 올라가 이쪽저쪽으로 오락가락 하다가 되돌아보더니 아무도 없다 없어 라고 말하고는 바로 법당에서 나왔다.
이같은 덕산의 기개를 두고 후세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그를 찬미하여 노래하고 있다.
무리 가운데서 뛰어나려면 모름지기 덕산처럼 영특하고 신령해야만 하고 적을 이기려면 사자처럼 맹렬해야만 한다. 선불장(選佛場)에서 덕산과 같은 안목이 없다면 설사 천년을 수행한들 무슨 영험이 있겠는가 라고.
덕산의 이같은 경지에 이르러선 반드시 통방작자(通方作者)라야만 그 경지를 체득할 수 있으리라.
무엇 때문에 그럴까. 불법은 덕산의 말대로 허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불법 가운데는 허다한 번거로움이 없기 때문에 현사(玄沙)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청정하여 밝고 시원하여 무심하기만 한 경계는 가을 연못에 어린 달그림자와 같고, 고요하게 사무치며 완전하게 감응함은 고요한 밤에 울리는 종소리와도 흡사하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심한 경계(無心境)는 허다한 일이 없고 덕산에게도 번거로운 일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없고 없는 경지에는 잘잘못이나 시비도 없고, 기특하거나 현묘한 도리도 없다. 이미 기특함이나 현묘함까지 없다면 덕산이 법당에서 오락가락했던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겠는가.
이러한 덕산의 행동을 위산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 때 가령 위산의 높은 경지가 아니었다면 도리어 그에게 굴욕을 한번 당했으리라.
위산스님의 노련한 솜씨를 살펴보라. 위산은 그 자리에서 덕산을 상대하면서 그와 직접 맞부딪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성패를 관찰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설두스님은 착어(着語)하여 말하기를 위산은 덕산의 경지를 간파했구나 라고 하였다.
덕산은 법당을 나와 산문에 당도하자마자 말하였다.
그래도 경솔하게 하지는 말아야지
위산스님과 간담까지 드러내고 한바탕 겨루어 보리라 마음먹고 다시 되돌아 와 서로가 상견례를 끝내고 위산이 앉으려 하자 덕산은 위산이 앉으려 하는 좌복을 나꿔채면서 말하였다.
스님!
위산이 불자를 잡고 때리려 하자, 덕산은 뒤질세라 바로 할을 하고 나와 버렸다. 덕산의 이같은 행동은 참으로 기특하기만 하다. 이를 두고 두 분 선지식의 의도를 모르는 대중들은 말하기를 위산이 덕산을 두려워했다 고들 하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위산의 경지는 대지ㆍ삼라만상ㆍ천당ㆍ지옥ㆍ인간ㆍ초목을 일시에 한 개의 할로 만들어 온다 해도 그것에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선상을 뒤엎고 벽력같은 할로 대중을 쫒아낸다 해도 역시 꿈적도 하지 않으리라.
덕산이 떠난 뒤 위산은 석양 무렵에 이르러서야 수좌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새로 찾아 온 객승은 어느 곳에 있느냐 라고 하자, 수좌는 말하였다.
바로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고 떠났습니다
위산은 말하였다.
그는 앞으로 절대향상의 경지에서 암자를 짓고 불조를 꾸짖고 욕을 하면서 있으리라
위산의 이 말씀은 덕산을 곱게 봐주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위산의 예언대로 그 이후 덕산은 부처님과 조사를 욕하고 꾸짖기를 비바람이 몰아치듯 하였다. 위산은 이처럼 덕산의 평생의 지혜와 기량을 꿰뚫어지게 간파했던 것이다.
위산이 덕산의 기량을 판정했던 이 경지에 이르러서 위산이 덕산에게 수기(受記)를 내렸다고 해야 겠느냐, 아니면 위산이 표범처럼 사납고 날카로운 덕산을 굴복시켰다고 해야겠느냐.
가령 이같이 알아차린다면 위산의 근본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리라.
다시 말해서 낱낱의 본분지위로부터 그들 두 스님을 살펴본다면 위산은 스스로 위산이고, 덕산도 스스로 덕산이어서 각자 그들 나름대로의 가풍을 수립하였으므로 서로가 전혀 간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 무슨 우열을 용납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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